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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은 ‘도덕’이나 '윤리'를 가르치는 책 으로 알기 쉬우나, 사실은 '도와 덕에 대한 경전' 이라는 뜻이다. '도’ -> 우주의 궁극실재(uldimate reality) 혹은 근본 원리(incple) ’덕' -> 그 도가 구체적인 인간이나 사물 속에서 자연스럽게 구현될 때 얻어지는 힘 도덕경 전체를 통해서 주어지는 기본 메시지는 우주의 기본 원리인 도의 흐름을 체득하고, 그 흐름에 따라 살아감으로 참다운 자유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덕을 보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모든 다른 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궁극 실재 혹은 절대적 실재는 우리의 제한된 표현을 초월한다는 주장이다. ‘도’라고 하던가 뭐라고 이름이나 속성을 붙이면 그것은 이미 그 이름이나 속성의 제한을 받는 무엇으로서 절대적인 도일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무명 혹은 무 일 뿐이라는 것이다. 도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드러나 보이지도 않는 신비의 측면, 다른 하나는 이름 붙일수도 있고 드러나 보이기도 하는 현상의 측면이라는 것이다. 전자는 실상의 세계로서 무명 혹은 무의 세계, 후자는 현 상의 세계로서 유명 혹은 유의 세계다. 무라고 해서 물론 전혀 아무것도 없는 헛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보통으로 존재하는 유와는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보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에서의 무이다. 만일 우리가 욕심을 비우고 깊은 형안을 갖게 되면 전자인 실상계의 신비를 직관하게 되지만, 욕심을 가지고 사는 한 눈앞에 나타나는 현상계만을 감지하고 살 뿐이라고 한다. 실상계든 현상계든 이름만 다를 뿐 모두 '도‘라는 한 가지 근원에서 나온 것,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신비 중의 최고 신비라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wtgenstein)은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느냐 하는 것보다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신비스럽다." 고 했다. 🐨분별의 세계, 일상적 상식의 세계를 초탈해라 ‘도’의 입장에서 보면 반대나 모순처럼 보이는 개념들이 서로 다른것이 없을 뿐 아니라 빙글빙글 돌아 고정된 성질로 파악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좀더 어려운 말로 하면 이원론적 세계관을 벗고 양쪽을 동시에 생각하는 변증법적 사고방식, 양쪽으로 대립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모순이 아니라 하나라고 보는 양극의 조화 반대의 일치를 터득하라는 것이다. 도덕경에 나오는 '성인' 이라는 말은 전체에서 약 30번 정도 사용되는 중요한 말이다. - 성인의 어원 : 귀가 밝은 사람, 귀가 밝아 보통 사람이 감지하지 못하는 것도 잘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 우리말로 성인이라고 하면 윤리적으로 완벽한 사람 정도로 생각하기 쉽다. - 성인의 본래 뜻 : 윤리적 차원을 넘어, 말하자면 특이한 감지 능력의 활성화를 통해 만물의 근원, 만물의 참됨, 만물의 그러함을 꿰뚫어 보고 거기에 따라 자유롭게 물 흐르듯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이런 사람이 도덕경에서 그리는 이상적인 인간형이다. 이런 성인은 '무위‘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무위' 라는 것은 ’도덕경‘에서, 그리고 ’장자‘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행동 원리다. - 무위란? : '행위가 없음(non-action) 이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무위도식하거나 빈둥거린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무위란 보통 인간사에서 발견되는 인위적 행위, 과장된 행위, 계산된 행위, 쓸데없는 행위, 남을 의식하고 남 보라고 하는 행위, 자기 중심적 행위, 부산하게 설치는 행위, 억지로 하는 행위, 남의 일에 간섭하는 행위, 함부로 하는 행위 등 일체의 부자연스런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런 무위의 위를 실천하는 사람은 자기 행동 때문에 누가 잘되거나 무슨 일이 이루어져도 자기의 공을 주장하거나 과시하려 하지 않는다. 도덕경 전체를 놓고 볼 때 무지를 강조한 것은 우리의 이원론적 사고에서 얻어진 일상적인 지식, 세상을 도의 입장에서 보지 못 한데서 나온 단견, 소위 ‘분별지’로서의 지식을 버려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른바 잘못된 배움을 '없애 가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뭔가 새로운 것을 깨달아 간다고 하는 것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지식을 버리는 것이다. 지구가 둥글다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은 지구가 판판하다는 지식을 버리는 것이다. 계속 버려서 결국 우리의 제한된 안목에서 얻어졌던 일상적 지식이 완전히 없어지는 완전한 '무지' 의 경지에 이르면 그때 새로운 의미의 완전한 앎, 궁극 지식의 경지가 트이는 셈이다. 이를 박학한 무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세상의 본 모습 그대로가 ‘도’ 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삶이란 도에 맞추어 도처럼, 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 도와 함께 흐르고, 도와 함께 춤추는 것이다. 도가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고, 엉킨 것을 풀어 주고, 빚을 부드럽게 하고, 티끌과 하나가 된다고 했을 때 우리도 그처럼 너무 날카롭거나, 너무 얽히고 설킨 관계를 유지하거나, 너무 광내려 하거나, 너무 혼자 맑은 채 도도하게 굴거나 하지말고 양쪽을 함께 포용하고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라는 것을 동시에 이야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도는 우주의 궁극 근거로서 무시적이고 무시간적이고 초시간적이라는 뜻이다. 🐨 나를 비우는 것이 나를 완성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 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고 했다. 앞세우지 않기에 앞서게 된다는 「도덕경」의 말과 일맥 상통한다. 사람들 앞에서 높아지기 위하여 일부러 낮추거나 남의 앞에 서기 위해서 일부러 뒤에 서는 얄팍한 공리적 계산에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이기적인 자기를 누르고 극복한 사람은 자연히 영적으로 위대한 사람이 된다는 종교적 공식을 이야기하고 있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무아’라는 것도 원칙적인 면에서는 대동소이하다고 볼 수 있다. ‘나’라는 것은 허구에 불과하므로 거기에 집착하는 오류, 이런 오류에서 연유하는 온갖 부정적인 결과에서 해방을 얻으라는 것이다. "나를 비우는 것이 나를 완성하는 것“ 이라는 가르침은 이처럼 건전한 종교들의 기본 지침이 되고 있다. 🐨 되 돌아옴 도덕경에서 밝히는 기본 가르침 중 하나가 ‘되돌아옴’의 원리다. 만사는 그저 한쪽으로만 무한히 뻗어가는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 가다가 어느 정도에 이르면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벗어나자 도는 '있음'의 편과 '없음'의 면을 다 포괄하는 궁극 실재이다. 그러나 우리 범속한 인간은 대개 있음의 세계, 현상의 세계만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달라붙는다. 이제 눈을 떠서 이런 있음의 세계를 통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없음의 세계, 비존재의 세계에 눈을 돌리고 그것이 지닌 근원성, 역동성, 창조성 등을 인지하라는 것이다. 일상적 주객 분리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근거한 학문은 궁극 해결일 수 없다. 정중한 대답과 오만한 응대, 선하다는 것과 악하다는 것이 본질적으로 다른 이원적인 것이라는 가르침은 결국 본질론자들의 이분법적 발상이다. 이분법적 상식의 세계를 넘어서서 초이분법적 의식 세계에서 사물을 보는 사람은 이처럼 막 부러진 흑백 이분의 논리에 지배되지 않는다. 상식적 윤리 세계에서는 예와 아니오가 분명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하겠지만, 윤리적 차원을 넘어서는 영역에서는 '예‘와 '아니오'가 그렇게 명쾌하게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일상적 의식의 합리적 차원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 이런 차원을 넘어선 사람을 보면 아주 흐리멍텅하고 답답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위대한 사람은 뭇사람의 이해를 얻지 못해 외로운 법이다. 🐨 사람은 땅을 본받아야 한다. 도덕경에서는 구체적으로 땅의 무거움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땅은 무거운 것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것이다. 사람, 특히 지도자는 땅의 이런 묵직함을 본받아 중후하고 침착해야 한다. 경박하거나 조급하거나 초조해서는 안 된다. 안달하거나 덤벙거리거나 촐랑거리거나 부산을 떨지 말고 땅처럼 의연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인은 사물을 높은 차원 에서 내려다보기 때문에 사물의 어느 한 면만 볼 때 필연적으로 따르는 단견, 이로 인한 흥분, 조바심 같은 것에 지배되지 않고 자기의 기본 자세에서 흐트러짐이 없이 의연하고 초연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 🐨 하늘의 그물은 엉성한 것 같지만 특별한 이기적 동기나 의도가 없이 자연적으로 하는 무위의 행동은 결국은 최고의 행동이다. 언뜻 보아 하늘의 그물은 너무나 커서 어쩔 수 없이 성기고 엉성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그것을 빠져나갈 수 없도록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제한된 생각으로는 당장 뭔가 설치면서 저돌적으로 나가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 같고, 비폭력주의 같은 소극적 대처 방안에 따라 처신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실패할 것처럼 보이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하늘이 그렇게 엉성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 그러니 상대방의 잘잘못을 가지고 당장 너무 조급하게 반응하지 말라. 결국은 하늘의 정의가 강처럼 흐르게 될 것이라는 하늘에 대한 신뢰감을 가지고 살라는 것이다. 🐨 내가 마음에 들었던 장 (责任编辑:) |
